독립운동 최고 명문가 일군 사탕수수 노동자
인삼상 출신 1905년 하와이 이민 강씨와 아들 5형제 모두 포상 한 가정 6명 최다ㆍ유일 서훈 장남ㆍ둘째는 안창호의 동지 국민회ㆍ흥사단 결성해 주도 식당 운영해 20년간 독립기금 대한제국 광무 9년(고종 42년.1905년) 5월28일 태평양 바다 위. 강명화(38)는 만감이 교차했다. 내일이면 그가 탄 이민선 차이나(S.S. China)호①는 하와이에 도착한다. 고베항을 떠난 지 11일 만이다. 수중에 돈은 고작 80센트②가 전부다. 함께 배에 탄 장남 영대(21)와 둘째 영소(20), 넷째 영상(15)이 든든했지만 막내 영각(8)은 아직 어리다. 낯선 땅에서 살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사탕수수 농장의 월급은 18달러(2016년 화폐 가치 486달러)라고 했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조국에 두고온 처와 딸, 셋째 아들도 하루빨리 미국으로 데려와야 했다. 이역만리로 떠나며 결심한 더 큰 목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국의 독립이다. 넉 달 전 일제는 독도를 병합해 '다케시마(竹島)'로 이름을 바꿨다③고 했다. 통탄할 노릇에 한숨은 깊어졌다.'나라와 내 앞날이 어찌 될꼬….' 111년 전 하와이행 이민선에 올랐던 강명화의 심정을 역사와 기록으로 각색했다. 이민선 위에서 그는 비록 사탕수수 노동자중 한명④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미주 독립운동사 최고의 명문가'를 일군 애국지사로 기억되고 있다. 강명화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만3930명 중 독보적인 존재다. 그와 아들 5형제가 모두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았다. 한가족 6명의 서훈은 유일하다. 재미 한인 항일애국운동을 주도한 대한인국민회의 주춧돌을 그와 아들들이 만들었다. 최초의 한인비행사양성학교, 미주 최초의 영문 청년신문 제작까지 최초의 기록에는 어김없이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미주 독립유공자 전집'의 저자 민병용 한인역사박물관장은 "미국 한인사회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독립운동 명문 가정이 탄생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와이에서 본토로=1868년 평안남도 증산 출신인 강명화는 평양의 인삼상인으로 전국에 다니면서 일찍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그가 이민선에 오른 것은 서른여덟 살 때다. 열일곱에 얻은 장남 영대를 비롯해 네 아들과 함께였다. 아내 송씨와 딸 봉강, 셋째 아들 영문은 데려오지 못했다.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와이에 내린 지 반년도 채 안돼 본토로 이주했다. 둘째 영소만 하와이에 남고 셋은 아버지를 따라 본토로 건너왔다. 기록에 따르면 1905년 10월7일 강명화는 공립협회⑤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 가입한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본토에서 인삼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그 필요성을 미 전역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민온 지 6년 만이자 국민회가 결성된 지 2년만인 1911년 11월22일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총회장에 올랐다. 그후 20여년간 시베리아, 만주, 멕시코까지 다니며 지방총회를 만들었다. 시카고호 갑판위에서 조국을 걱정하며 내린 지 28년 만인 1933년 3월 시카고에서 66세로 삶을 마쳤다. ▶아버지의 길을 따른 오형제=아들들은 올곧게 아버지를 따라갔다. 맏형 강영대와 둘째 강영소는 도산 안창호의 동지였다. 대한인국민회의 2개 주춧돌인 공립협회 대표 6인과 합성협회의 대표 7인에 각각 강영대와 강영소의 이름이 올라있다. 국민회로의 통합을 형제가 주도한 셈이다. 두 사람 모두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사 편집인도 지냈다. 시카고 지역 전 언론인 조광동씨는 1979년 8월9일 한인이민사 연재에서 이 두 형제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라 일이라면 돈과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형제가 바로 영대와 영소였다. 돈을 벌어서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흥사단에 보내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중략) 망국의 이야기가 나오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특히 둘째 강영소는 도산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미주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⑥로 불렸다. 도산과 함께 흥사단도 창단했다. 1913년 5월 열린 흥사단의 창립식 장소가 강영소의 집이었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1916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부자 총회장은 유일하다. ▶시카고에 자리잡다=독립운동한국에 남았던 셋째 강영문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민을 떠난 지 9년만인 1914년 3월29일 혼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26세의 늦은 나이에 왔지만, 독립의 열정은 형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1920년 가주 월로스 한인비행사양성소에 참가해 서기로 활동했다. 1923년에 형제중 가장 먼저 시카고로 이주해 훗날 강씨 형제들의 보금자리가 될 식당을 마련했다. 넷째 강영상도 이듬해 시카고로 가서 식당 경영에 합류했다. 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일류 주방장이었다. 영대, 영소 두 형들도 아버지를 모시고 시카고로 이주했다. 당시 강씨 형제의 식당에서 한승인 전 주불공사가 쿡 보조로 일했다. 한 전 공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형제들이 로렌스 식당을 사이좋게 경영했다. 둘째 영소와 셋째 영문이 회계이과 물품구입을 맡았고, 넷째 영상이 주방 요리사였다." 형제들은 그후20여 년간 이 식당 수익으로 독립기금을 지원했다. ▶하와이로 돌아간 막내 강영각=그는 이민온 지 4년만인 12세되던 1909년 LA에서 학교를 다녔다. 업랜드소학교, 클레어몬트 중학교, 포모나대학을 거쳤다. 남가주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형들이 있는 시카고로 가지 않고 1920년에 다시 하와이로 돌아가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청년조선(The Young Korean)⑦을 발간한것도 이때다. 아버지, 형들을 거쳐 그에게 유전된 강씨 가문의 애국심은 1931년 신한민보에 실린 그의 기고문에서 도드라진다. "나는 두가지 결심을 하고 장래에 실행하고자 하나이다. 첫째는 국민을 위하여, 둘째는 국민회를 위하여 나의 재능과 물질적, 도덕적, 그리고 모두를 다하여 돕고자 하나이다." ▶서훈 연도=막내 강영각이 1997년 가족 중 가장 먼저 포상(건국포장)을 받았다. 2011년 둘째 강영소(독립장), 2012년 아버지 강명화와 넷째 강영문이 애족장을, 2013년 장남 강영대와 넷째 강영상에게 각각 애족장과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강씨 부자들중 아버지 강씨와 둘째 강영소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출처=미주 독립유공자 전집 정리=정구현 기자 --------------------------------------------------------------------------------------------------------------------- 역사 소사전 ①차이나호=한인 이민자를 운송한 증기선 11척 중 하나다. 이 배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총 7차례 한인 이민자들을 실어날랐다. 최대수용 승객은 1등석 139명, 2등석 41명, 3등석 347명 등 총 527명이다. 미국 국립기록관리처(NARA)의 차이나호 승객 기록에 따르면 강명화가 탄 차이나호는 고베항에서 5월18일 출항했다. ②NARA의 데이터베이스에는 강명화의 승선권과 현재 이민심사기록격인 승객 명부가 남아있다. 영문 철자는 Kang, Myeng Wha다. 14번째 소지 현금을 묻는 질문(Whether in possession of $50, and if less, how much)에는 $0.80로 적었다. 오리건대학 물가 계산기에 따르면 2016년 화폐 가치로 17달러다. ③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28일이다. 바로 다음달인 2월22일부터 시네마현은 현 고시 제 40호에 따라 독도의 이름을 다케시마로 부르기 시작했다. ④다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강명화의 승객 명부 직업란에도 'Farm Laborer'로 적혀있다. ⑤1903년 도산 안창호 주도로 조직된 상항친목회가 전신이다. 이후 조직이 확대되면서 1905년 공립협회로 개칭했다. 1909년 합성협회와 통합하면서 재미 한인 항일애국운동을 주도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됐다. ⑥신한민보 1921년 2월10일자에 보도된 강영소 기사다. '10여 년 동안을 하와이와 미주에서 국민회에 대해 몸을 바쳐 정성껏 일한 강영소 선생의 공로는 1만 한인들이 다 아는바라…표장을 하엿는데 곧 금으로 만든 국민회 훈장이라더라.' ⑦동아일보 1924년 2월27일자는 "네 페이지의 영문신문으로 발행부수는 오백부 가량이며 주필은 강영각이다.(중략)미국에 있는 조선사람이 발행하는 영자신문으로는 하나뿐이더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