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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애국지사, 전체 독립유공자 중 고작 1% 215명

미주 독립운동사 과소평가 반증하는 통계 한국 정부 홍보 부족 추가 발굴 더뎌 민병용 관장 "앞으로 100명 더 서훈되어야" 지난 1993년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유공자 2만명을 새로 발굴 포상한다는 획기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유공자 보상과 복지를 대폭 개선하겠다는 정부 의지라고도 했다. 그러나 1994년 현재 6453명이었던 독립유공자 수는 2015년 현재 1만3408명에 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중 미주 출신 독립유공자는 215명으로 전체의 1.6%에 불과하다. 1900년대 초반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건너온 미주 한인들은 매일 고된 삶을 살면서도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지 않았다. 그들 역시 삶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국민회를 만들었고 친일 세력 저격에 몸을 바쳤으며 품삯을 아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기까지 40여 년간을 한결같이 애국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단 215명만이 기억되고 있을 뿐 '잊혀진 애국 지사'들은 여전히 많다. 미주독립유공자 전집의 저자 민병용 한인역사박물관장은 "215명이라는 숫자는 미주지역 독립운동이 한국에서 과소평가되어왔다는 방증"이라며 "미주지역에서 최소한 100여명이 추가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주 애국지사 발굴작업이 더딘 이유로 그는 한국 정부의 홍보 미숙을 들었다. 유가족들이 어떻게 신청하는지 모르는 데다가 영어로 된 안내서나 공고가 없어 대부분 2세인 독립유공자 자손들이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민 관장은 "더이상 세월이 가기전에 한국 정부는 전문가를 미국에 파견해 자료를 모으고 미주 애국자 발굴사업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 관장은 향후 한국 정부가 서훈해야 할 미주 애국지사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황사용(1881~1964)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공립협회에 참여하면서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 LA지방회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1909년 4월부터 1910년 1월까지 멕시코 노동이민의 참상을 조사해 국민회의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하고 돌아왔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특파원으로 하와이에 파견돼 독립운동 참여를 역설했고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흥사단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독립발기인 샌프란시스코 대표단의 대표 임시정부 연합국회 대표로 선임됐다.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인 황사선의 형이다. 황사선(1885~1974) 1913년 4월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숭실학교 재학시절 을사오적 타도를 선언하고 이근택의 집에 불을 지른 사건에 관여했다.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1915년 1916년 1928년 세차례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3.1 운동 후 변준호 등 12명의 동지를 모아 청년혈성단을 조직했고 매달 10달러씩 임시정부에 지원했다. 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송위리(1924~2002) 1943년 일본 징집을 피해 한국에서 만주로 피신했고 중경으로 가서 미 육군 전략첩보처(OSS) 정보부대에 입대해 항일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군사 훈련을 받은 뒤 상해 제 3지하공작대에서 일본군 포로를 면담 군사정보를 캐내어 일본군의 무기창고와 석유 저장시설을 폭파하는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1945년 봄 중국 항주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중국 주둔 일본 관동군의 남방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철도와 다리 운송열차를 폭파했다. 독립유공자 송종익의 아들이다. 현재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이순기(1882~1943) 1905년 하와이에 노동이민을 왔다. 1909년 국민회 LA지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17년에는 국민회 다뉴바 지방회 회장을 지냈다. 1919년 이승만 박사를 후원하기 위해 이살음 임일 김호 이범영 등과 함께 노동개진당을 발족했다. 평생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미국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의 부친이다. 최정익(미상) 1906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908년 3월21일 친일외교 고문 더햄 스티븐스의 망발에 항의했던 4인 대표중 한명이다. 1908년 12월26일 공립신보 주필에 선임되었고 이듬해 6월에는 정재관에 이어 국민회 북미 총회장에 당선됐다. 강영승(1888~1987) 1905년 하와이 노동이민자다. 시카고 해밀턴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려했지만 인종차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승만 박사 정한경 박사와 함께 '미주의 3박'이라고 불렸다. 공부를 마친 뒤 1920년 샌프란시스코로 갔고 1922년 2월 국민회 북미 총회장에 선출됐다. 신한민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 1929년에는 흥사단에도 입단했다. 독립유공자가 된 부인 박원신과 누님 강혜원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어머니 황 마리아는 하와이에서 대한부인회를 창립하고 1919년 대한부인구제회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온가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현재 부인과 함께 할리우드 포레스트론에 묻혀있다. 이외에도 이승만 박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민찬호 목사 역시 서훈받아야 할 독립유공자다. 그 외 다음의 초기 지도자들이 미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임준기와 김승길은 상해 임시정부에 1000달러 이상의 독립의연금을 보내 표창장을 받았다. 백인명은 3.1운동 때 자유신종보 혁신공보 신문을 비밀리에 인쇄 배부했다. 진명학교 기숙사에서 만세를 불렀다. 상해로 가려다 붙잡혀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LA에 와서 이승만 박사의 동지회 회원으로 후원사업을 했다. 안승화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했다. 노디 김 손은 하와이 동지회 및 대한인부인구제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안정송은 하와이 부인구제회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했다. 흥사단 미주위원부 위원장을 역임한 백영중씨가 추천한 미주 애국지사는 임인제 조갑석 하희문(하희옥씨 부인) 등이다. 민 관장은 "북가주비행학교 학생 및 교관들 OSS와 NAPKO 작전에 참가한 초기 한인들 대한인국민회 전임 총회장들도 서훈받아 마땅한 분들"이라고 했다. 출처=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정리=정구현 기자 미주독립유공자 전집은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이사장 권영신)과 한인 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 밝은미래재단(이사장 홍명기)이 지난해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펴냈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간 조국 독립에 힘쓴 미주 독립유공자 215명의 삶과 꿈을 기록했다. 저자인 민병용 관장은 집필을 위해 언론사 재직시절인 1976년부터 지난해 33년간 자료를 수집했다. 직접 만난 독립유공자 14명의 인터뷰 내용도 담았다. 집필기간은 1년2개월이다.

2016-02-14

"어머니들이여 대한을 안아주소서"

미주애국지사 215명 중 여성 16명 3·1운동 이후 여성들도 본격 활약 시급 15센트 모아 4만6000달러 송금 한인 어머니들은 강하고 위대했다. 어떤 이는 사진 신부로, 또 남편을 따라 하와이로 건너온 그녀들은 나라 사랑이 자녀 교육이라는 사명을 잊지 않았다. 여성독립운동단체를 창립했고, 독립자금을 모았다. '미주 독립유공자 전집'에 등재된 215명중 여성은 16명이다. 미주 여성 독립운동은 1919년 3.1 운동 직후 본격화됐다. 하와이와 중가주에서 싹이 텄다. 특히 1919년 8월2일 중가주 다뉴바에서 각 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모여 설립한 대한인여자애국단이 주축이 됐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을 고기 먹지 않는날로, 수요일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파는 간장 안먹는 날로 정해 근검 절약하면서 가정마다 후원금을 모았다. 대한여자애국단 규칙 2조는 '단합하여 애국정신을 고취하며 근검절용하여 돈을 모으며 때를 따라 의연금을 모집하여 대한독립단을 응원하기로 함'이라고 되어 있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가 지원한 독립기금은 20만 달러를 넘었다. 또 대한여자애국단은 4만6000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당시 한시간 품삯이 15센트도 안되던 시절이었다. 부녀자들은 가정마다 매달 3달러의 회비를 냈다. 아끼고 아낀 돈들은 상해임시정부로, 워싱턴구미외교부로, 신한민보의 후원금으로 쓰였다. 또 남편의 독립운동을 묵묵히 내조했다. 그래서 부부 독립유공자들이 탄생했다. 도산 안창호.이혜련 부부를 비롯해 권도인.이희경, 김성권.강혜원, 김성권.강혜원, 정양필.이양숙, 강영문.박영복, 양주은.이제현 등이다. 또 문성선 여사와 아들 한시대 선생 모자가 지난해 유공자로 선정됐다. 당시 미주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임했던 각오를 신한민보의 글로 대신 옮겨적는다. ▶1920년 9월23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한성신의 글=우리는 어떤 처지로 어떤 곳에 있던 지 꼭 대한여자들이로소이다. 꼭 대한의 권리라야 나의 권리가 되며 대한의 자유라야 나의 자유가 되며 대한의 행복이라야 나의 행복이 됩니다. 이를 벌써 깨달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오라비, 누이, 동생들은 대한의 권리,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으며 죽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런데 만일 해외에 있는 대한 여자로서 그 책임과 의무를 잊고 혼자 잘 먹고 평안히 있는다면 무엇이 그리 기쁘며 무엇이 그리 만족하오리까? 보소서 이제 간절히 우리의 부모와 가장이 되시는 이들에게 바라는바 여러분의 딸들이나 아내들이 나라를 돕겠다고 돈을 좀 청구할 때에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거나 성을 내지 마소서. 대한은 남자 여러분의 대한만 아니요, 우리 여자들의 대한도 되나니 여러분의 아내나 딸들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의무를 다하게 하소서. 아! 아! 대한의 어머니들이여 벌거벗은 대한을 위하여 입은 옷이라도 벗어주소서. 대한의 누이들이여 주린 대한을 위하여 식은 밥 한 술이라도 먹여주소서. 대한의 딸들이여 목마른 대한을 위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마시게 하소서. 대한의 어머니들이여 누이들이여 딸들이여 오랫동안 남에게 수욕을 당하고 구박을 당하되 구원할 이 없고 도와줄 이 없어 슬픔과 아픔에 싸여서 죽게 되었던 대한이 머리를 들고 겨우 일어서려고 할 때 손을 잡아주소서. 두 팔을 펴서 안아주소서 따뜻한 가슴속에 깊이깊이 안아주소서. 출처=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정리=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2016-01-31

대한·독립·만세 외친 '세 발의 총성'

샌프란시스코 스티븐스 저격 한국민족운동사 첫 의열투쟁 안중근·윤봉길 의거 이어져 한인들 '구명 공판투쟁' 합심 8000여명이 20여만 달러 모금 전명운 무죄·장인환 10년 복역 "탕! 탕! 탕!"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선착장 앞. 총성은 단호했다. 50대 미국인 남성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와 뒤엉켰던 20대 한인 남성이 어깨에 총상을 입고 주저앉았다. 두 사람 앞에는 30대 한인이 아직 채 화약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육혈포(권총)를 쥐고 있었다. 세계를 놀라게한 한국민족 역사상 첫 '의혈 투쟁'의 시작은 하와이 이민자들에 의해서였다. 쓰러진 미국인은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당시 56세)로 친일파 외교고문이었다. 부상당한 한인은 전명운 의사(24), 총을 쏜 한인은 장인환 의사(32)다. 두 의사 모두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출신이다. 월요일 오전 번잡한 부둣가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의 발단은 이틀 전으로 거슬러간다. 이날의 의거 전말을 대한매일신보 4월22일자에 적힌 그대로 옮긴다. ▶108년전 대한매일신보의 증언= 3월21일에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소위 한국 정부고문관 슈지분(스티븐스)이라하는 미국놈이 미국 각 신문 기자들에게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이후로부터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은고로…"라며 한국을 모욕했다. 우리 동포들은 대단히 격분되어 22일 밤 여덟 시에 상항공립관에서 공동회를 열고 최유섭씨 등 4인을 선정해 슈지분에게 따져 묻기로 결정했다. 넷이 여관에 찾아가 슈지분에게 한국 형편을 묻는데 대답하기를 "한국에는 리완용(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의 큰 행복이라. 한국 백성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만일 일본이 한국을 차지하지 아니하였으면 벌써 아라사(러시아)에게 빼앗겼을지라" 하거늘. 4인중 정재관씨가 이말을 듣고 분개를 이기지 못하여 주먹으로 슈지분의 멱통을 지르니 방안에 앉았던 수백 명 손님이 대경하여 붙잡고 말리는지라. 이튿날 상오 9시30분 슈지분이가 상항에서 화성돈(워싱턴 DC)으로 향하려 부두 선착장에 당도하매 애국하는 두 의사(장인환, 전명운)는 어느 곳으로 쫓아 왔는지 벌써 대기하고 있는 중이라. 슈지분이가 일본 영사와 자동차에서 내릴 때에 두 의사가 좌우로 공격하여 총소리가 3차례 났고, 슈지분이가 탄환을 맞고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상항 경찰서에서 슈지분 피살 급보를 듣고 가본즉 슈지분은 탄환 2개를 맞았는데 한발은 등 뒤를 뚫어서 폐부(허파)가 상하고 한발은 다리에 맞아 이틀 뒤 죽었다. 의사 전명운씨도 어깨에 유탄 한발을 맞았는데 생명은 상하지 않았던 고로 즉시 병원으로 보내고 의사 장인환씨는 경찰서에 피착(구금)되었다. 의사 전명운씨는 대답(경찰 진술)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고 토지를 육탈하며 부녀를 강간하며 우리의 이름까지 학살하니 미국으로 건너와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다.…(중략) 슈지분이가 한국 월급을 먹는자로서 일본을 환영한다, 은혜로 안다는 등 세계에 반포하였으니 슈지분은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원수라. 그런고로 나는 애국성으로 그놈을 포살하려했다." ▶미주 한인들의 구명운동=두 선생의 스티븐스 총살 의거는 이후 재판과정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침 의거의 발생과 공판진행이 미국 내에서 일본인 노동자배척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인의 동정 여론을 얻기에 유리했다. 미주 한인사회는 의거 직후 결속, 공판투쟁을 벌였다. 7000여 미주 한인이민자와 멕시코 농장의 1000여 한인들이 자진해 모금한 성금액은 8390달러에 달했다. 현재 화폐 가치로 2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다. 최근 한국으로 위탁 보존 결정된 대한인국민회의 유물본지 1월21일자 A-1면>중 가장 오래되고 사료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 당시 한인들의 모금 내역이다. 전명운은 4월 3일 살인미수혐의로 법정에 섰다. 검찰은 전명운을 살인사건의 공범임을 강조했지만 변호사는 '이번 사건으로 총상까지 입은 피해자'라고 반박했다. 법정은 사건 발생 97일 만인 그 해 6월27일 증인도, 증거도 없다면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장인환 선생은 '살인중죄인'으로 기소됐다. 재판은 그 다음 해 1월 2일까지 280일까지 이어졌다. 검찰은 선생을 1급 살인범으로 몰아 처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피고측 변호사는 선생의 스티븐스 총격은 결코 일반적인 '살인'이 아니고 애국적 광란으로 인한 무지각적 범죄이므로 애국지사인 선생은 당연히 무죄 방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완전한 정신상태(insane)'에서 저지른 범죄 행위로 맞선 것이다. 이 공판도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 선생은 처형을 면하고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의혈활동의 신호탄=두 선생의 의거는 국내외 독립운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 침략의 불의 비행을 국제 여론에 호소할 수 있었고, 두 선생의 구명을 위해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통합해 '국민회'가 창설됐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등 세계적인 의열투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두 선생은 큰 족적을 남겼지만 말년은 모두 안타깝다. 11년의 복역을 마친 장인환 의사는 1927년 4월 한국으로 귀국했으나 일본의 감시와 옥고로 인한 신병 때문에 그해 10월11일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이후 3년여 우울증을 앓다가 1930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 정부는 1975년 장인환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유해를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전명운 의사는 무죄로 풀려난 후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했다. 재미 일본인들의 보복 테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석방된 지 6개월 뒤에 연해주로 이주, 이듬해인 1909년 봄 안중근과 조우한다.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그해 10월26일 결행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도 선생의 영향이었다. 1929년에 부인을 여읜 그는 LA로 이주해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렵게 자녀를 키우며 살다가 1947년 11월18일 타계했다. 전 의사의 유해는 LA의 캘버리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1994년 4월 고국으로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출처=미주독립유공자 전집 정리=정구현 기자

2016-01-24

[알림] 미주 독립유공자 215명 전집, 연중기획 '잊혀진 애국' 연재

111년 전 기록이지만 아직도 잉크는 선명하다. 1905년 5월11일 일본 고베에서 출발한 호놀룰루행 증기선 차이나호에 탔던 사탕수수 이민자 강명화의 승선권(사진)이다. 미주 독립운동 최고 명문가문 탄생은 이 승선권에서 시작됐다. 2015년 현재 한국정부가 포상한 독립유공자는 1만4264명이다. 이중 강명화와 그의 아들 오형제 6명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한 가정내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가 탄생했다. 강씨처럼 힘든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의 길을 꿋꿋이 걸은 미주 독립지사들의 역사가 지난해 '미주독립유공자 전집-애국지사의 꿈'이란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관계기사 10면> 밝은미래재단(이사장 홍명기)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사장 권영신)의 지원으로 민병용 한인역사박물관장이 집필했다. 책은 1949년부터 2015년까지 미주지역에서 선정된 독립유공자 215명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332페이지 분량에 사진 850장도 담겼다. 본지는 이 책의 내용을 '잊혀진 애국'이라는 제목 아래 연재한다. 전집 내용을 바탕으로 고신문과 역사를 참조해 현재형 이야기식으로 재구성한다. 잊혀져가는 미주 독립운동의 역사를 조명함으로써 한인사회의 뿌리를 되새기고 긍지를 함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2016-01-10

독립운동 최고 명문가 일군 사탕수수 노동자

인삼상 출신 1905년 하와이 이민 강씨와 아들 5형제 모두 포상 한 가정 6명 최다ㆍ유일 서훈 장남ㆍ둘째는 안창호의 동지 국민회ㆍ흥사단 결성해 주도 식당 운영해 20년간 독립기금 대한제국 광무 9년(고종 42년.1905년) 5월28일 태평양 바다 위. 강명화(38)는 만감이 교차했다. 내일이면 그가 탄 이민선 차이나(S.S. China)호①는 하와이에 도착한다. 고베항을 떠난 지 11일 만이다. 수중에 돈은 고작 80센트②가 전부다. 함께 배에 탄 장남 영대(21)와 둘째 영소(20), 넷째 영상(15)이 든든했지만 막내 영각(8)은 아직 어리다. 낯선 땅에서 살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사탕수수 농장의 월급은 18달러(2016년 화폐 가치 486달러)라고 했다. 한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조국에 두고온 처와 딸, 셋째 아들도 하루빨리 미국으로 데려와야 했다. 이역만리로 떠나며 결심한 더 큰 목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국의 독립이다. 넉 달 전 일제는 독도를 병합해 '다케시마(竹島)'로 이름을 바꿨다③고 했다. 통탄할 노릇에 한숨은 깊어졌다.'나라와 내 앞날이 어찌 될꼬….' 111년 전 하와이행 이민선에 올랐던 강명화의 심정을 역사와 기록으로 각색했다. 이민선 위에서 그는 비록 사탕수수 노동자중 한명④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미주 독립운동사 최고의 명문가'를 일군 애국지사로 기억되고 있다. 강명화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만3930명 중 독보적인 존재다. 그와 아들 5형제가 모두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았다. 한가족 6명의 서훈은 유일하다. 재미 한인 항일애국운동을 주도한 대한인국민회의 주춧돌을 그와 아들들이 만들었다. 최초의 한인비행사양성학교, 미주 최초의 영문 청년신문 제작까지 최초의 기록에는 어김없이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미주 독립유공자 전집'의 저자 민병용 한인역사박물관장은 "미국 한인사회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독립운동 명문 가정이 탄생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와이에서 본토로=1868년 평안남도 증산 출신인 강명화는 평양의 인삼상인으로 전국에 다니면서 일찍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그가 이민선에 오른 것은 서른여덟 살 때다. 열일곱에 얻은 장남 영대를 비롯해 네 아들과 함께였다. 아내 송씨와 딸 봉강, 셋째 아들 영문은 데려오지 못했다.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하와이에 내린 지 반년도 채 안돼 본토로 이주했다. 둘째 영소만 하와이에 남고 셋은 아버지를 따라 본토로 건너왔다. 기록에 따르면 1905년 10월7일 강명화는 공립협회⑤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 가입한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본토에서 인삼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그 필요성을 미 전역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민온 지 6년 만이자 국민회가 결성된 지 2년만인 1911년 11월22일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총회장에 올랐다. 그후 20여년간 시베리아, 만주, 멕시코까지 다니며 지방총회를 만들었다. 시카고호 갑판위에서 조국을 걱정하며 내린 지 28년 만인 1933년 3월 시카고에서 66세로 삶을 마쳤다. ▶아버지의 길을 따른 오형제=아들들은 올곧게 아버지를 따라갔다. 맏형 강영대와 둘째 강영소는 도산 안창호의 동지였다. 대한인국민회의 2개 주춧돌인 공립협회 대표 6인과 합성협회의 대표 7인에 각각 강영대와 강영소의 이름이 올라있다. 국민회로의 통합을 형제가 주도한 셈이다. 두 사람 모두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사 편집인도 지냈다. 시카고 지역 전 언론인 조광동씨는 1979년 8월9일 한인이민사 연재에서 이 두 형제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라 일이라면 돈과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형제가 바로 영대와 영소였다. 돈을 벌어서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흥사단에 보내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중략) 망국의 이야기가 나오면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특히 둘째 강영소는 도산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미주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⑥로 불렸다. 도산과 함께 흥사단도 창단했다. 1913년 5월 열린 흥사단의 창립식 장소가 강영소의 집이었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1916년 1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부자 총회장은 유일하다. ▶시카고에 자리잡다=독립운동한국에 남았던 셋째 강영문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민을 떠난 지 9년만인 1914년 3월29일 혼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26세의 늦은 나이에 왔지만, 독립의 열정은 형들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1920년 가주 월로스 한인비행사양성소에 참가해 서기로 활동했다. 1923년에 형제중 가장 먼저 시카고로 이주해 훗날 강씨 형제들의 보금자리가 될 식당을 마련했다. 넷째 강영상도 이듬해 시카고로 가서 식당 경영에 합류했다. 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일류 주방장이었다. 영대, 영소 두 형들도 아버지를 모시고 시카고로 이주했다. 당시 강씨 형제의 식당에서 한승인 전 주불공사가 쿡 보조로 일했다. 한 전 공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형제들이 로렌스 식당을 사이좋게 경영했다. 둘째 영소와 셋째 영문이 회계이과 물품구입을 맡았고, 넷째 영상이 주방 요리사였다." 형제들은 그후20여 년간 이 식당 수익으로 독립기금을 지원했다. ▶하와이로 돌아간 막내 강영각=그는 이민온 지 4년만인 12세되던 1909년 LA에서 학교를 다녔다. 업랜드소학교, 클레어몬트 중학교, 포모나대학을 거쳤다. 남가주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형들이 있는 시카고로 가지 않고 1920년에 다시 하와이로 돌아가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청년조선(The Young Korean)⑦을 발간한것도 이때다. 아버지, 형들을 거쳐 그에게 유전된 강씨 가문의 애국심은 1931년 신한민보에 실린 그의 기고문에서 도드라진다. "나는 두가지 결심을 하고 장래에 실행하고자 하나이다. 첫째는 국민을 위하여, 둘째는 국민회를 위하여 나의 재능과 물질적, 도덕적, 그리고 모두를 다하여 돕고자 하나이다." ▶서훈 연도=막내 강영각이 1997년 가족 중 가장 먼저 포상(건국포장)을 받았다. 2011년 둘째 강영소(독립장), 2012년 아버지 강명화와 넷째 강영문이 애족장을, 2013년 장남 강영대와 넷째 강영상에게 각각 애족장과 대통령표창이 수여됐다. 강씨 부자들중 아버지 강씨와 둘째 강영소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출처=미주 독립유공자 전집 정리=정구현 기자 --------------------------------------------------------------------------------------------------------------------- 역사 소사전 ①차이나호=한인 이민자를 운송한 증기선 11척 중 하나다. 이 배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총 7차례 한인 이민자들을 실어날랐다. 최대수용 승객은 1등석 139명, 2등석 41명, 3등석 347명 등 총 527명이다. 미국 국립기록관리처(NARA)의 차이나호 승객 기록에 따르면 강명화가 탄 차이나호는 고베항에서 5월18일 출항했다. ②NARA의 데이터베이스에는 강명화의 승선권과 현재 이민심사기록격인 승객 명부가 남아있다. 영문 철자는 Kang, Myeng Wha다. 14번째 소지 현금을 묻는 질문(Whether in possession of $50, and if less, how much)에는 $0.80로 적었다. 오리건대학 물가 계산기에 따르면 2016년 화폐 가치로 17달러다. ③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1905년 1월28일이다. 바로 다음달인 2월22일부터 시네마현은 현 고시 제 40호에 따라 독도의 이름을 다케시마로 부르기 시작했다. ④다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강명화의 승객 명부 직업란에도 'Farm Laborer'로 적혀있다. ⑤1903년 도산 안창호 주도로 조직된 상항친목회가 전신이다. 이후 조직이 확대되면서 1905년 공립협회로 개칭했다. 1909년 합성협회와 통합하면서 재미 한인 항일애국운동을 주도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됐다. ⑥신한민보 1921년 2월10일자에 보도된 강영소 기사다. '10여 년 동안을 하와이와 미주에서 국민회에 대해 몸을 바쳐 정성껏 일한 강영소 선생의 공로는 1만 한인들이 다 아는바라…표장을 하엿는데 곧 금으로 만든 국민회 훈장이라더라.' ⑦동아일보 1924년 2월27일자는 "네 페이지의 영문신문으로 발행부수는 오백부 가량이며 주필은 강영각이다.(중략)미국에 있는 조선사람이 발행하는 영자신문으로는 하나뿐이더라"고 소개했다.

2016-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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